사랑의 기하학
존 치버 소설집 | 황보석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나는 어둠을 좋아하오. 어둠이 방이 아주 많은, 예순 개나 일흔 개쯤 되는 집처럼 느껴져서. 「샘 파는 기술자 아르테미스」, 406~407쪽.
두 번째로 읽은 존 치버 책.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2쪽 판권면으로 짐작해 보건대, 수록 작품의 발표 연도가 1946년부터 1978년까지 제각각인 모양이다. 낯부끄러운 찬사로 역자 후기를 가득 채우지 않고 수록 작품의 출판 이력이나 편집 기준을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출판사 보도자료를 확인해 보니 단편선집인 영문판 <The Strories of John Cheever>의 편집을 그대로 따라 한국어판을 낸 듯하다. 번역은 괜찮은 것 같다.
뒤로 갈수록 작품이 좋았다. 「헤엄치는 사람」, 「퍼시」, 「샘 파는 기술자 아르테미스」는 아주 좋았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내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재나 각각의 작품의 밀도가 고르기보다 폭넓게 다양했다.(아마 최대 20년까지 발표 연도에 차이가 나는 데서 비롯한 것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모든 단편에서 옅든 짙든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있었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멜랑콜리와 회한"의 정서였다.
미국 단편소설 하면 카버를 떠올리지 않기는 힘들다. 카버는 1939년생으로 1988년에 죽었고, 치버는 1912년생으로 1982년에 죽었다. 1973년에 치버가 61세일 때 둘이 아이오와에서 워크숍 강사로 만나 일 년 동안 술을 마셨다고 한다. 치버는 당시에 단편과 장편으로 이미 유명한 소설가였고, 카버는 아마도 주목받는 작가 정도로 인정받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 알코올중독으로 엉망진창인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카버 쪽이 균열과 상실의 정서를 더 건조하고 날카롭게 드러냈던 것 같다, 날이 서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치버는 그보다 덜하다. 이 단편집에서 치버는 이야기꾼으로서 솜씨를 마음껏 선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팔코너』가 뒤늦게 좋아졌다.(설명하기는 힘든데, '납득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작품을 더 읽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