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김승희 선생님의 문예창작론 수업을 들을 때 선생님이 직접 추천해주신 책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이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고, 소설과 산문을 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셨다.
신촌 홍익문고에서 몇달 전에 샀다. 무슨 책을 읽을까 하고 책상 위에서 어지럽혀져 있는 책들을 뒤적거리다 별로 굵지 않아서 골라냈다. 읽고나서 보니, 참 좋은 책 이다.
소설, 시, 희곡, 산문 등 장르적 글쓰기의 방법과 요령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가볍고 유쾌한 산문도 아니다. '글쓰기' 자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글을 쓰고자 하는지. 우리가 글을 쓸 때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글은 어디서 어떻게 쓰면 즐거운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다.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다. 어느 형식이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다.
읽다보니 좋은 구절들이 너무 많았다. 애써 간추려 보았는데, 그래도 길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소설을 읽고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4쪽)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68쪽)

자신의 생각대로 글을 조절하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때그때 솟아 나오는 감정들을 글로 써 내려가라.
바로 이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경험과 추억, 감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오븐에서 막 꺼낸 피자처럼 종이위에 옮겨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풀어 주라. 아주 쉬운 말로 단순하게 시작하고, 당신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애써라. 처음에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서투르고 꼴사나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당신은 지금 스스로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는 것이다.(75쪽)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강박관념들을 목록으로 정리해 본다. 목록 내용은 자꾸 변하는데 숫자는 언제나 불어난다. 어떤 것은 고맙게도 아예 잊혀지기도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쓰게 되어 있다. 자주 출몰해서 괴롭히는 것, 절대 잊을 수 없는 것, 자신의 육체가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야기로 엮는다.(78쪽)

결국 당신은 돈을 버는 일보다 글을 쓰기 위해 바보가 되는 것도 무릅쓰는 글쟁이의 인생에 더 많이 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글을 쓸 시간이 많을 때 나는 아주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 반대로 시간에 쫓겨 정작 자신이 원하는 일도 못하고 있는데 세금고지서가 날아오면 그야말로 거지가 된 기분이다.(92쪽)

글쓰기에 관련된 오래된 속담이 하나 있다.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이다. 무슨 뜻인가? 이것은 이를테면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서,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보여 주라는 뜻이다. 당신 글을 읽은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글을 쓰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냥 보여 주라는 말이다.(117쪽)

당신이 수없이 누군가에게 말했던 이야기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그것으로 글쓰기의 많은 부부은 이미 이루어졌다.(134쪽)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수시로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글쓰기를 배우는 방법이다. 그들은 한 작가에게 다가가,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을 통해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휴식을 취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136쪽)
... 그리고 여기에는 절대 질투심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대단한 작품을 썼다면,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당신은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137쪽)

그냥 쓰고, 또 쓰라. 세상의 한복판으로 긍정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떼어 놓아라. 혼돈에 빠진 인생의 한복판에 분명한 행동 하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164쪽)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또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근사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은 비밀이다.(193쪽)

글은 장편소설이나 단편, 시, 희곡 등 장르마다 모두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정해진 형식에 맞는 글을 쓰고 싶다면 그 형식으로 적은 글을 많이 읽는 게 최고다. 그 형식만이 가지고 있는 호흡을 눈여겨 보라. 맨 첫 문장이 무엇이었나? 어떻게 끝을 맺었는가? 같은 형식의 글을 많이 읽으면 그 형식이 당신의 의식에 저절로 각인이 된다. 그래서 직접 글을 쓰려고 할 때 그 구조에 맞는 글을 쓰게 된다.(199쪽)

예술은 의사소통이다. 고독의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은, 거기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동지애와 연민을 배우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비슷한 처지의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당신의 인생을 알려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게 된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이것은 지난 8월 네브라스카 주를 횡단할 때, 초저녁 푸른 자동차 속에 혼자 앉아있는 내 기분을 쓴 글이야"라고 말해주라.
고독을 이용하라. 고독의 아픔은 당신에게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만들어 줄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을, 당신의 더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이용하라.(225쪽)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다. 왜냐하면 당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글쓰기란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시간 낭비가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 자신의 소박한 인생에 매료되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된다. 평범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257쪽)


책을 읽으면서 위로와 격려 모두를 얻은 기분이다. '세부 묘사'라든가 '말하지 말고 보여주라' 같은 평소 의식하고 있었던 부분들에 대한 조언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한편 당장 조바심을 내지 말고, '일단 열심히 읽고 보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난 아직 도스토옢스키도 다 읽어보지 않았고 헤르만 헤세도 그렇고 파우스트도 안 읽었다. 번뜩이는 무언가를 잡아내어 글로 옮겨낸 많은 고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읽어나가며, 그곳에서 배운 지혜와 쉬지 않고 흐르며 새로운 상황과 관계를 보여주는 현실의 소재들을 붙잡아 마음 가는대로 꾸준히 글을 써 나가기만 하자. 그러다보면 언젠가 소설도 써볼 수 있겠지. '소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구도 쓰지 않은 나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의미있는 사실이라고 믿자. 
정말 좋은 책이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나탈리 골드버그 (한문화,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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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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