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Requiem(1991년)

안토니오 타부키 Antonio Tabucchi 지음 |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해설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처음 몇 문단을 읽다가 그만두었다. 며칠 전에도 적었듯이 도서관을 나서면서 처음 몇 쪽을 읽자마자 재밌었다. 책이 참 예쁘다. 큰따옴표 없이 문장 안에서 쉼표와 마침표 만으로 대화를 서술한다. 그래서인지 쉼표 모양이 독특하다. 이걸 가지고 또 친구에게 삼사 분 동안 내 생각을 늘어놓았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는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그렇게 된 대화를 읽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대화에 쓰인 말이 참 편하고 자연스럽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역자보다는 편집자들이 적잖은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학자가 쓴 소설이어서 공부하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구석이 많다. 나는 그냥 재밌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나며 온 도시를 헤집고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 평생 동안 한 사람의 말 속에서 허우적댄 사람이 바치는 마지막 찬가. 고작, 이라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고생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글쎄요, 내가 말했다, 일을 했죠, 그러니까 정확히 작가였습니다,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얘기들을 썼거든요, 아니, 아름답다는 말은 좀 그렇고, 그 친구가 쓴 얘기들은 비통한 것들이었어요, 그 친구 자신의 삶이 순탄치 않고 비통했으니까요. 34쪽


사람들은요?, 그가 물었다, 사람들은 어때요? 많이 읽고 많이 마십니다, 내가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죠, 저는 마실 줄 아는 사람이 좋아요. 그럼 포르투갈 사람도 좋아하시겠네요, 그가 일종의 논리를 들이대며 말했다. 82쪽


그래서, 그가 말했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날 찾아오는 이야기들을 글로 써야겠다고, 그렇게 해서 열 개의 이야기를 썼지요, 비극적인 것, 희극적인 것, 희비극적인 것, 극적인 것, 감성적인 것, 역설적인 것, 냉소적인 것, 풍자적인 것, 환상적인 것, 현실적인 것, 이렇게 말입니다, 그리고 종이 뭉치를 들고 출판사에 갔어요. 105쪽


나와 함께한 것이 편하지 않았나요?, 그가 물었다. 아니요, 내가 대답했다, 대단히 중요했어요, 하지만 불안하게 했지요, 말하자면 언제나 날 가만두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랬겠지요, 그가 말했다, 나와 관계된 건 다 그렇더군요, 하지만 말예요, 문학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안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의식을 평온하게 하는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동의합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점도 있어요, 저도 나름대로는 이미 꽤나 불안정합니다, 당신의 불안정이 내 불안정에 더해서 고뇌로 이어진 것입니다. 평화로운 행진보다는 고뇌가 좋습니다, 그가 확신을 표명했다,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라면 단연 고뇌지요. 112쪽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겁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용기 있는 문학이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어로 쓴 체코 작가를 생각해보세요, 당장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데, 정말로 용기 있는 글을 썼잖습니까? 카프카, 내가 말했다, 이름이 카프카지요. 그 사람이에요,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 사람도 좀 겁쟁이지요. 그 사람이에요,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 사람도 좀 겁쟁이지요. 나의 손님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일기를 보면 겁이 많은 구석이 있어요, 그런데 무슨 용기로 그런 놀라운 책을 썼을까요?, 죄에 대한 책 말입니다. <소송>이요?, 내가 물었다, <소송>일 겁니다. 그래요, 맞아요, 그가 말했다,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용기 있는 책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무엇에 대한 죄책감일까요?, 내가 물었다. 뭐라니요?, 그가 물었다, 태어난 것이 곧 죄겠지요, 그후에 일어나는 것들도 죄고, 우리 모두가 죄를 짓고 있어요. 115쪽


난 뛰어난 춤꾼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현대의 춤꾼>이라는 작은 책으로 독학을 했거든요, 그런 작고 얇은 책을 좋아했어요, 그런 책들이 실질적인 것들을 가르쳐줬거든요, 저녁 늦게 사무실에서 돌아올 때면 연습을 했죠, 혼자서 춤을 추고 시를 쓰고 애인에게 편지를 썼어요. 그녀를 무척 사랑했군요, 내가 말했다. 내 마음의 보석상자였어요, 그가 대답했다. 122쪽




레퀴엠

저자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3-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작가 유럽 지성계가 찬탄한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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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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