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Here is Where We Meet (2005년)

존 버거 소설 |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이 소설이 『킹』보다 나은 소설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에게는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소설의 문장들은 정말로 다정했다. 다정한 글이 세상에 얼마만큼 있을까. 그 다정함이 너무 좋았다. 다정한 문장을 전해 준 역자가 고마웠다.(역자 소개 글에서 『리버타운』을 알아보았다.) 나중에 소설로 영어를 익히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그렇게 읽을 작가와 소설이 하나 더 생겼다. 어떤 사람들이  존 버거를 좋아하는지 이 책을 읽고 나니 대강 알 것 같다. 미술부터 음악까지 폭넓은 교양과, 서구의 현대사에 대한 진지하고 정중한 태도, 감각적이고 흔하지 않은 묘사와 비유 등등. 많이 보고 듣고 읽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작가이다. 앞으로 더 읽을 것 같다.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 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 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리스본, 16쪽


혼자라서 외로웠어요.

그건 정말 의외로구나, 얘야. 너는 자유로웠어.

모든 게 겁이 났어요. 지금도 그래요.

당연하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니? 두려움이 없거나 자유롭거나 둘 중의 하나지, 둘 다일 수는 없어.

둘 다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확실히 모든 철학의 목표겠죠, 어머니.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건 철학이 아니야. ... 사랑은 그럴 수 있지, 잠깐 동안. 리스본, 30~31쪽


네 아버지처럼 자주 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네 아버지의 반만큼 용감한 사람도 알지 못했어. 리스본, 42쪽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남들이 보라는 곳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데에도 생각이 일치했다. 의미는 비밀 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이었다. 제네바, 71쪽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별안간 스케치북을 내려놓는다. 그는 자기연민을 혐오했다. 많은 지성인들의 나약함이지. 그는 말했다. 그런 태도를 경계해야 해! 그건 그가 내게 전해 준 유일한 도덕적 명제였다. 크라쿠프, 87쪽


일찍 일어나. 그것도 아주 일찍. 문을 닫는 건 새날을 시작할 때 일종의 보호막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얼마 전부터 평온함이 없으면 아침을 맞을 수가 없다네. 매일같이 강해지겠다고 결심을 해야 해.

이해하네.

아마 못 할걸, 존. 나는 고독한 사람이야. 이리 오게, 정원을 보여 줌세. 아일링턴, 123쪽


내가 어디 있느냐고요? 이젠 아예 답을 외웠다. 여기 있죠, 여기 나 자신의 한가운데에. 마드리드, 147~148쪽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은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선 스타일이 필요불가결하며, 사람이란 희망을 가지고 살거나 아니면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중간이란 없었다.

스타일? 어떤 가벼움. 어떤 행동이나 반응을 배제시키는 부끄러움. 어떤 우아한 제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떤 멜로디를 기대할 수 있으며, 때로는 찾을 수도 있으리라는 가정. 하지만 스타일은 희박하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찾아 나선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타일과 패션이 같은 꿈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그 둘은 서로 다르게 창조된다. 스타일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그것이 인고의 기질과 세월을 대하는 무던한 자세를 요구하고 키우는 바로 그 때문이다. 스타일은 음악과 매우 흡사하다. 슘과 칭, 168쪽


욕망은 덧없다. 몇 시간이든 한 생이든, 둘 다 덧없다. 욕망이 덧없는 이유는 영속적인 것에 대한 반항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싸우며 시간에 도전한다. 그리고 춤이 바로 그 도전이다. 슘과 칭, 212쪽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저자
존 버거 지음
출판사
열화당 | 2006-03-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미술평론가, 사진이론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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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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