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씨네형제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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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 (열린책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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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대박. 이거야말로 대박. 이런 작품이 있으니 기대를 품지 않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아직 읽지 않은 고전들이 너무너무너무 많다. 이런 소설들이 있는데 소설 읽기를 그만두는 것은 정말 큰 손해다.
커트 보네거트 소설 <제5도살장>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대량학살 이전 인간의 삶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만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고. 그 구절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몇년 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휴가 때 충동적으로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중.하 두 권을 샀다.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 이런 작품은 마음이 동할 때 얼른 사서 읽어버려야 한다. 이 시기에 읽지 않았다면 살면서 과연 언제 읽게 되었을지 자신없다.
상.하 로 된 보급판 중 상 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 권만 따로 살 목적으로 서점에 들렀더니 양장으로 된 상.중.하 판본만 있고 내가 찾는 판본은 없댄다. 인터넷서점을 뒤져보고 그날이오면, 이음책방,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도 모두 전화해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중.하 권을 따로 구입했다. 처음엔 출판사의 못된 심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펴들고 읽다 보니 바뀌었다. 양장으로 된 게 확실히 읽기 편하다. 그리고 보급판처럼 한 권에 700쪽이 넘어가 버리면 책 자체가 너무 두꺼워져 들고 다니기도 불편하다.
너무 방대한 책이지만 흡입력이 굉장하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지하게 궁금해서 긴 대화문도 참고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대화들 하나하나도 흥미진진하지만, 하여간 너무 기니까. 중반 쯤 되니 차라리 줄거리를 미리 알고 있다면 문장 자체에 편히 집중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 하 권 말미를 살펴 보니 열 쪽 정도로 짧게(!) 줄거리를 요약한 글이 실려 있었다. 만약 책을 읽기 전 요약문이 실려 있음을 알았다면? 그래도 줄거리 요약은 안 읽을 거 같긴 하다.
흥미로운 대목을 하나하나 꼽자면 감당이 안 될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나 고민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보네거트 소설 속 인물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 작품 안엔 인간 삶의 모든 부정(어둠, 고통, 그러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 - '악'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 신앙과 종교, 가족, 사랑, 질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 맏이 드미뜨리의 불행과 고통은 '돈' 때문에 증폭되었고 그를 구렁텅이로 이끌었다. 단지 '돈' 때문에. 그 삼천루블, 오늘날의 한화로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삼천루블 때문에!

거기엔...... 거기엔, 형제, 지금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거야. 다시 말해서 어떤 아름다움에, 여자의 육체에, 혹은 여자 육체의 한 부분에 빠져 들게 되면(색마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지) 자기 친자식이라도 갖다 바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심지어 러시아와 조국까지도 팔아먹게 돼. 그래서 정직했던 사람도 도둑질을 하게 되고, 온순한 사람도 살인을 하게 되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변심을 하게 되지. 149쪽, 라끼찐

<벌레에게는 정욕을!> 내가, 얘야 바로 그 벌레에 해당된단다. 그건 특히 나를 지칭하는 말인 거야. 그리고 우리 까라마조프 집안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천사 같은 너의 내부에도 벌레가 살고 있고 너의 피는 폭풍을 잉태하고 있단다. 그건 폭풍이지, 왜냐하면 정욕은 폭풍이고, 또 폭풍보다 더 엄청나기 때문이지!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란다! 무서운 것이지, 아름다움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고 결코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며 신이 던진 유일한 수수께끼이니까. ... 아니야, 인간은 광활해, 너무나 광활해, 나는 그걸 축소시킬 거야. 나 원 참,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넌 그 비밀을 알고 있니?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비밀스러운 것이란 사실은 정말 끔찍스러워. 거기에서는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싸움터는 다름 아닌 인간들의 마음이지. 하지만 고통받는 인간들은 그걸 털어놓는 거야. 197~198쪽, 드미뜨리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너도 알다시피 그건 내가 끝까지 나의 추악한 세계에 살고 싶기 때문이란다. 그 점은 너도 잘 알 거다. 추악한 세계가 더 달콤하거든. 모두 그 세계를 비난하지만 모두 그 세계에 살고 있고, 남들은 몰래 그 짓을 하지만 난 드러내 놓고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런 나의 정직한 태도를 빌미로 그 추잡한 놈들은 내게 달려들고 있지. 308쪽, 아버지 까라마조프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가까운 사람들이란, 내 생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거든. 어떤 기회에 어디선가 나는 성자 <자비로우신 요한>을 읽은 적이 있는데,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한 행인이 그를 찾아와 몸을 녹이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요한은 그를 자기 침대에 나란히 눕도록 한 다음 그를 품에 안고 어떤 무서운 병 때문에 고약한 악취가 풍기는 그의 입에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는 거야. 난 그가 사랑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자신에게 부여된 천벌 때문에 기만의 발작에서 이런 일을 했다고 확신해. 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가 몸을 숨겨야 하는데, 그가 자기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면 사랑은 사라져 버리고 말지. 420~421쪽, 이반

왜냐하면 지금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애쓰면서 자기 자신만의 성취된 삶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삶의 완성 대신에 단지 완전한 자살 행위를 끌어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아 실현의 성취 대신에 완전한 고립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 왜냐하면 자기 하나에 대한 기대감만을 지닌 채 전체로부터 자신을 하나의 개체로 떼어 놓고서는 인간의 도움, 인간 자체, 인간성 등을 믿지 않도록 자신의 영혼을 훈련시켜서 자기 돈이, 그리고 돈으로 얻은 자신의 권리가 사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533쪽, 조시마 장로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어째서 집에 불이 난 어머니들이 저렇게 서 있는지, 어째서 저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어째서 저렇게 불쌍한 아귀들이 있는지, 어째서 초원이 저렇게 황량해졌는지, 어째서 저들은 서로 안아 주고 입맞춤하지 않는지, 어째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않는지, 어째서 저들은 혹독한 재난 때문에 까맣게 변했는지, 어째서 아귀들에게 젖을 주지 않는지 말이야. 884쪽, 드미뜨리

만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땐 인간이 지상의,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겠지. 굉장한 일이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선행을 실천하는 존재가 되겠어? 그게 문제지! 나는 언제나 그 생각을 하고 있어.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며, 누구를 찬송하게 될까? 1028쪽, 드미뜨리

서양 문명을 두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빼놓고 이해할 수 없다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런가보다 했지 그게 대체 어느 지점에서 왜 그런건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작품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 본인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리스 정교 신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내 주위의 기독교인들은 더 흥미로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오늘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소설을 사고 말았다. 독후감을 통해 추천 받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이참에 그의 작품을 모두 다 읽어볼 생각까지 생겼다.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세상에는 바보이기 때문에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많은 법이지. 1030쪽, 드미뜨리
바로 여기에 끔찍한 치욕이 마련되어 있다. 282쪽, 드미뜨리
이봐요 리즈, 모욕받은 사람들은 상대가 마치 은인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얼마나 괴롭고 힘겨워하는지 몰라요...... 384쪽, 알료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 두 사람은 내게 해준 것이 뭐야? 619쪽, 라끼찐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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