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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문학과지성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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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책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들, 책 읽기에서 읽는 것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좋아할 책이다. '읽어버린 책들의 묘지'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그 사랑에 얽힌 다른 사랑들, 20세기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들 - 전쟁, 독재, 배신 같은 것 - 이 추리 소설처럼 펼쳐진다. 숨막힐 정도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준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아들은 흥분과 두려움에 흽싸여 되묻는다. “엄마한테도요?” 아버지는 슬픈 웃음을 띠며 대답한다. “엄마한테는 할 수 있지. 엄마랑 우리 사이에는 비밀이 없잖니.” 

소설의 첫 장면이고,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첫 장면의 부자(父子) 역할은 주인공 다니엘과 그의 아버지 샘페레 씨가 맡았다. 다니엘의 어머니이자 샘페레 씨의 아내는 몇 년 전에 죽었다(추측컨대 내전에 관계된 것 같다). 그 이후로, 다니엘의 말을 빌리자면, 샘페레 씨는 단 한 번도 온전히 즐겁게 웃은 적이 없다. 그의 슬픈 웃음. 자라나는 아들이 속을 썩이고, 상처 주고, 반항하여도 아버지는 헌책방을 지키며 아들을 기다린다. 

소설의 본 줄거리로 접어들면서 샘페레 씨의 비중은 작아진다. 하지만 저자와, 적어도 한국어판 표지 디자이너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은 모두 다니엘과 샘페레 씨가 만들어 낸다는 걸. 잘 등장하지 않는 동안에도 다니엘의 주변 인물들은 샘페레 씨가 정말로 훌륭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삶으로 아들의 존경을 얻는 아버지. 오래 전에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그래서 더 이상 온전히 즐겁게 웃지 않는 아버지. 언제나 슬프게 웃는 아버지.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만큼 개성 있다. 바르셀로나의 골목과 거리가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누구나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더라도 그 도시가 얼마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지는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표지에 쓰인 사진은 내가 이 소설에서 받은 모든 감동을 함축적으로 담아냈다. 짝짝짝. 

 
 

언젠가 아버지 서점의 단골 고객 한 사람이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준 첫 번째 책처럼 한 독자에게 그토록 많은 흔적을 남기는 대상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첫 번째 이미지들, 우리가 뒤에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는 그 말들의 울림이 평생 동안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 기억에 하나의 궁전을 새겨놓는다. 1권, 17~18쪽 

클라라의 아버지는 민중들은 결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지 않는데 눈썹 밑에까지 전쟁이 다가왔을 때는 더욱 그렇다고 항상 말했었다. 그는 역사를 잘 읽을 줄 알았기에 미래가 조간신문보다는 거리와 공장 그리고 병영에서 더 분명하게 읽힌다는 걸 알고 있었다. 1권, 37쪽 

여자들은 한 남자가 언제 자기들을 정신없이 사랑하게 되는가를 안다. 그건 절대로 틀리지 않는 본능인데, 그 문제의 남자가 도무지 어리석은 연하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1권, 49쪽 

“아마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이 아닌 우리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 거야.” 1권, 283쪽 

그때까지 그것이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이며 부재와 상실의 이야기였다는 걸 알지 못했다고, 그 때문에 그 이야기와 내 자신의 삶이 혼동될 때까지 나는 그 이야기 속에 피신해 있었다고, 사랑해야 할 이들이 단지 이방인의 영혼에 살고 있는 그림자일 뿐일 것 같아 소설 속으로 도망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했다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1권, 287쪽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2권, 386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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