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젤란: 불멸의 탐험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 | 1996년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 당시 유럽인들이 세계의 모습으로 믿던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메우스?)의 지도는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는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거긴 절벽이야.") 하지만 15세기 포르투갈 왕 엔리크의 고집. 는 당시 유럽인들의 우주를 믿지 않았다. 그의 통치 시기에 포르투갈은 이렇다 할 업적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하나,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1434년 질 에아네스가 불가능하다던 보자도르 곶(북위 26도, 아래 사진)을 돌아 기니에서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새빨간 거짓말으로 드러났다.

 

1471년에는 적도에, 1484년는 디에고 캄이 콩고강 어귀에, 1486년 마침내 포르투갈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다다랐다.(선박 건조 기술 및 항해술의 발전! <대포 범선 제국>(미지북스) 참고)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지형이 확인되었다. 전 유럽이 포르투갈을 주시했다. 엔리크는 이미 재임 시기 교황에게서 보자도르 곶 너머의 모든 육지와 바다, 섬은 포르투갈에 귀속된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안일해진 해상 왕국은 낯선 제노아인이 새로운 인도항로를 발견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를 외면했다. 그 남자는 스페인 국기를 달고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640800/Western-Sahara

http://en.wikipedia.org/wiki/Cape_Bojador

 

포르투갈의 우려는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493년 4월 교황은 교서를 내려 사과 자르듯 지구를 반쪽으로 잘랐다. 절단선은 베르데 곶 군도(http://en.wikipedia.org/wiki/Cap-Vert)에서 1백 레구아(1 레구아는 3 마일.) 지점으로 정했다. 발견된 나라가 경계선 서쪽에 있으면 스페인의 것, 동쪽이면 포르투갈의 것으로 했다. 1년 뒤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270레구아 떨어진 지점까지 경계선을 옮겨놓았고, 이렇게 해서 아직 발견되지도 않았던 브라질은 나중에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다. 츠바이크는 이 오만한 서구의 조치를 두고 색다른 평가를 내린다. “... 언뜻 보기에는 그로테스크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갈등을 폭력이 아닌 화해의 합일점을 찾아 풀어내려 한 평화적인 해결책은 역사상 드문 이성적인 행위라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라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지 난점. 그렇다면 지구 저 반대쪽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향료군도(오늘날의 말루쿠 제도)는 누구의 땅일까? 이 순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왜냐면 아직 아무도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내지 않았고, 교회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던 이 숨겨진 질문에서 마젤란의 탐험이 시작되었다. 


말루쿠 제도. 

http://ko.wikipedia.org/wiki/%EB%A7%90%EB%A3%A8%EC%BF%A0_%EC%A0%9C%EB%8F%84


1506년 3월 16일 인도 캘리컷 앞바다에서 일어난 카나노레 해전은 포르투갈이 자신의 동방 무역 독점에 쐐기를 박으려는 시도였다. 이집트의 술탄, 캘리컷의 차모린, 베니스인들이 물자와 병력을 연합하여 포르투갈 함대를 암습하려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방랑자 로도비코 바르테마, 라는 이탈리아인. 이 인간은 이교도로는 처음으로 금단의 도시 메카에 숨어들었고, 이미 마르코 폴로가 발 디뎠던 인도, 수마트라, 보르네오뿐만 아니라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향료군도까지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슬람 승려로 변장하고 유럽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암습 정보를 흘려듣게 되어 포르투갈 함대에게 알려줬고, 이로써 포르투갈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 무슨 영화 같은 이야기. 보통의 병사였던 마젤란은 이 전투에서 작은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어진 말라카 항구에서의 참패에서 마젤란은 비로소 조금 두각을 드러낸다. 이후 그는 장교로 승진한다. 1511년 포르투갈은 다시 한 번 말라카를 공격했다. 이로써 지브롤터 해협에서 싱가포르 해협까지 이르는 바다는 모두 포르투갈의 영해가 되었다. 


마젤란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삼십대 초반쯤 되었을 것이다. 7~8년여의 원정의 결과 자신에게 부와 명예,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그는 이내 북아프리카 원정에 다시 자원했으나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 사소한 누명까지 쓰자 곧장 포르투갈 왕 마누엘을 만나겠다며 왕궁으로 향해 국왕 알현을 요청한다. 츠바이크는 마젤란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미소지을 줄도 몰랐고, 사랑스럽지도 남의 호감을 살 줄도 몰랐으며, 자신의 생각을 재치있게 표현할 줄도 몰랐다. 남들과 대화할 줄도 몰랐고, 언제나 마음의 문을 닫고 고독의 덮개로 자신을 감싼 이 영원한 고립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음 같은 냉기와 불편함, 불신의 분위기를 풍겼음에 틀림없다."(79쪽) 무참히 거절당한 그는 으레 그렇듯 연줄을 만들고, 호감을 사고, 소문을 내는 등의 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왕을 알현한다. 그의 요구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아주 약간의 신분 상승. 국왕은 (나라도 아마 당연히) 거절한다. 두 번째 부탁, 새로운 일자리(함장직)도 거절당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는 의미심장한 카드를 던진다. 자신이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해도 아무 상관이 없겠냐고. 왕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니 마음대로 해라, 라고 대답했겠지. 


이후 마젤란은 포르투갈에 머무르며 한 측량사를 만나 자신의 은밀한 포부를 소리소문 없이 구체화해나간다. 당시 유럽에서 향료군도로 가려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건너야 했다. 아직 파나마 운하가 없던 이 시기에 서쪽으로 항해해 향료군도에 도달하려면 남아메리카를 돌아가는 길뿐이었다.(그런 길이 있다면.) 스페인 인들은 아르헨티나부터 그 아래 남쪽 아메리카 해안가를 열심히 탐사했다.(그래서 '라플라타 강'이 강인 줄도 모른 채 그저 거대한 만, 즉 '해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만 했다.) 내륙을 탐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당시는 아직 잉카가 피사로에 의해 약탈당하기 전이었고 포토지의 은광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그랬듯 이 검은 땅을 돌아 한시라도 빨리 향료군도에 도달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이내 좌절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아메리카 대륙이 매우 광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아메리카 대륙이 남극과 맞닿아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마젤란이라는 무명의 포르투갈 인은 아마존으로 흘러드는 오늘날의 라플라타 강(아래 그림)이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숨겨진 해협이라고 확신했다. 마젤란과 그의 동료는 전해내려오는 경험담과 숨겨진 지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엉망진창이었던) 측량 기법 등을 통해 숨겨진 항로가 있다고 확신했다. 


아래쪽에 보이는 라플라타 강. 실제로 보면 '바다'가 이어진 길처럼 보인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B%9D%BC%ED%94%8C%EB%9D%BC%ED%83%80_%EA%B0%95


그의 계획 자체는 전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항해자들 역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시도했다. 마젤란의 새로운 점은 그의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거기에 길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가 아니라 "거기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내게 배를 주면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왕궁의 비밀 문서 등을 들고 한 마디로 스페인으로 '튄다'. 상상해보자. 이 남자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도박꾼이었거나, 혹은 음험해 보일 정도로 신중하고 과묵한 가운데 보기 드문 자존심으로 자신의 운명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인간, 둘 중 한 부류였을 것이다. 이후의 행적을 통해 드러난 대로 이 남자는 후자의 인간으로 밝혀졌다. 삼국지로 치면 누구쯤 되려나. 


스페인에서 마젤란의 운은 술술 풀린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에 머무르던 포르투갈인을 만나 그의 딸과 결혼을 하고, 선박 협회에서는 이 남자의 계획에 주목하여 한 사업가가 합류하고, 이에 왕궁의 심사관들과 스페인 왕도 그의 계획을 승인한다. 마젤란은 1494년의 협약에 따른 기준선으로 볼 때, 자신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 반대편의 향료군도가 스페인의 것일 수 있다고 칼 5세에게 말한다. 마젤란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다.(오늘날 우리는 지금 마젤란이 뻥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명심하라, 아직 어떤 인간도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본 적 없었다. 즉,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누구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콜럼버스가 일생 동안 가장 미워한 대적자였던 추기경 폰세카가 마젤란의 계획을 심사하는 왕궁의 평의회 평의원 4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4인 중 가장 먼저 마젤란의 계획을 승인한다.


츠바이크는 이후 마젤란이 다섯 척의 선박을 이끌고 출항하기까지, 한 장을 할애한다. 보통의 전기 작가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방해 공작을 흥미진진한 일화 정도로 끼워넣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바로 이 대목에서 마젤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점이 소설보다 전기로 더 유명했던 츠바이크의 안목 아닌가 싶다. 며칠 전 그의 유작 <몽테뉴>를 읽어본 바로, 마젤란을 포함해 츠바이크가 칭송하는 인간은 자유롭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며 단지 자기자신의 운명에만 책임을 지는 인간, 이다. 


"마젤란이 지시한 모든 사항들은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유언은 결국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속자로 지정했던 자들은 아무도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의 육신도 원했던 장소에 묻히지 못했고, 문장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단지 그가 이루어놓은 세계일주라는 행위만이 인간의 삶보다 오래 계속될 것이고, 후대의 전 인류만이 물려준 유산에 대해 감사할 것이었다." 158쪽


마젤란의 행적 중 후대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 하나는 선상의 반란자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다. 이 과묵한 남자가 이끈 다섯 척 중 세 척의 배를 스페인 인들이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출항 전에 마젤란에게 공공연한 적개심을 표하기도 했다. 서로 말이 통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상상해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다. 여기서도 그는 첫 항의를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기습적으로 반란자를 제압해 갈등을 무마한다. 츠바이크는 마젤란이 보여준 놀라울 정도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두고 "결연한 인내"라고 표현한다.  


마젤란의 함대에 의해 오늘날의 몬테비데오가 '몬테비디'(위 라플라타 강 이미지 참고, 강 입구 바로 오른편에 위치해 있음,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젤란은 애초 염두에 두었던 산타마리아 곶에 도착했다. 여기서 보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파소'(길)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발설할 수 없었다. 호시탐탐 자신에게 반대하는 스페인 인들과 선원들의 불만이 폭발할 게 틀림없었다. 남반구의 2~3월은 겨울이 시작하는 시기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파타고니아의 황량한 땅만 펼쳐질 뿐이었다. 산마티아스 만에서도 그의 희망은 좌절되었다. 위도 49도의 산훌리안항에서 그는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마젤란을 구한 것은 웅변술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겠노라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저항을 끌어냈고, 그 다음 이를 철퇴 같은 손으로 때려부순 것이었다."(189쪽)


함장들의 정당한 요구에도 마젤란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츠바이크는 함장들의 요구와 항의가 자신들의 직분에 따른 정당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줄어든 식량, 앞으로의 항로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는 사령관, 불투명한 미래와 자신들의 생존. 쌓일 대로 쌓인 불만은 결국 함상의 반란으로 폭발한다. 마젤란은 두 척의 배를 빼앗긴다. 여기서 그는 매우 치밀한 계획을 세워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냉정한 지략가의 모습을 상상했다. 삼국지의 사마의 같은 인물. 그는 한 명의 함장을 처형했고, 나머지 두 주동자는 황량한 땅에 버리고 가기로 결정한다. 마젤란의 가장 대표적인 후배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57년 뒤 바로 같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반란자를 처형했다. 


바로 그 마젤란 해협을 목전에 앞두고(몇 마일만을, 위도 2도만 더 내려가면 되는데!) 마젤란은 다시 두 달을 더 육지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한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발자취가 닿은 적 없는 음침한 해협. 마젤란의 개척 이후 수 년 동안 한 척의 배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 해협을 건넌 사람은 마젤란뿐이었다. 


마젤란 해협 지도

http://en.wikipedia.org/wiki/Strait_of_Magellan


해협을 건너 이제 태평양을 앞두고 있는 순간. 유럽을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해협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새로 준비를 하고 와야 했다. 여기서 마젤란은 의미심장한 조치를 취한다. 그토록 과묵했던 남자가 선원 하나하나에게 앞으로 항해를 계속할지 의사를 물어본 것이다.(츠바이크는 마젤란의 이 조치가 유럽 귀향 후를 생각한 알리바이 만들기였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반란자들의 결말을 알고 있던 그들이 어떤 대답을 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이었던 인물이 있었고, 한 척의 배는 마젤란 해협 어딘가에서 뱃머리를 돌려 스페인으로 도망친다. 포르투갈 인 사령관이 스페인 인들을 무참히 처형했다는 변명을 품에 안은 채. 마젤란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제 그는 태평양을 건넌다. 


바다에서 보낸 1백일. 콜럼버스는 고작해야 33일을 바다에서 보냈다. 1백일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겨우 이 대양의 3분의 1을 지났을 뿐이다. 마젤란은 그를 괴롭히는 잔잔한 바람 때문에 이 바다를 '일 파시피코'(태평양)이라고 이름 붙였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선원이 굶어죽었다. 1521년 3월, 그들은 마침내 한 섬에 상륙한다. 오늘날의 지명은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남태평양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젤란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향료군도가 아니었다. 오래전 싱가포르 해협에서 데리고 왔던 흑인 노예 엔리케가 원주민과 대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북쪽으로 치우쳐 항해함으로써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유럽인도 알지 못했던 곳 필리핀이었고, 스페인 왕국의 가장 오랜 식민지 중 한 곳으로 남은 곳이다. 


조금 더 나아간 그들이 도착한 섬 마사바(도저히 지도를 찾을 수 없다. 원어 표기라도 해주면 좋았을텐데), 그곳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 탄생했다. 


"말라야인 노예 엔리크는 당황하며 멈추어 서버렸다. 그들의 말을 단어 하나까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섬사람들이 그에게 하는 이야기, 묻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고향에서 납치되었던 그는 이제 처음으로 자기 나라 말을 단편적이나마 다시 들어보게 된 것이었다. ... 지구가 우주를 떠돌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살아있는 한 인간이 지구를 한바퀴 돌아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252쪽


츠바이크가 말하듯이 바로 이 순간 마젤란은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자신의 업적은 완성되었음을 알았다. 정확히 해야할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사람은 마젤란이 아니었다. 바로 싱가포르 인근 출신의 한 원주민 노예였다. 엔리케, 라는 이름의 역사에 남게 된 한 아시아인이었다. 그 순간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 싱가포르에서 잡혀 유럽으로 끌려가,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 마침내 자기 고향에 도착했음을 동족의 언어로 확인한 그 순간. 


마젤란의 최후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다. 또한 이 대목에서 이 냉정한 남자가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서구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적은 피를 흘린 침략자였다(열 명 남짓한 비 서구인 + 서너 명의 서구인)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세부는 이슬람 상인이 오갈 정도로 큰 항구였다. 이들이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 상인의 경고를 듣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세부의 왕조차 마젤란과 친교를 맺고 결국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는다. 마젤란은 부하들을 엄격히 다스렸고, 교역이 비교적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했다. 절대 강압을 가하지 않고,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자발적인 신앙을 얻으려 했다. 그 결과 그는 세부의 왕에게 제발로 나서서 군사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작은 섬 막탄의 부족민 1천 명을 60명의 유럽인 병사만으로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다. 그의 계산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코르테스나 비사로도 4, 5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십만 명의 페루인을 상대했다. 당시 유럽인의 갑옷은 원주민들에게는 절대로 뚫을 수 없는 신비한 물건이었다. 마젤란의 계산은 이랬을 것이다. 총 몇 번 쏘고 칼질 좀 하면 금방 겁을 먹고 도망치겠지. 


막탄 섬의 산호초 때문에 보트는 해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중무장한 마젤란과 병사들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육지까지 걸어가야 했다. 소총과 쇠뇌는 보트에 두고 내려야 했다. 보트에 남은 수하들이 열심히 쏘아댔지만 육지까지 닿지 못했다. 칼과 갑옷만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유럽인이 천 오백 명의 원주민과 육박전을 벌였다. 마젤란은 결국 맞아죽었다. 그의 항해 전체를 함께 하며 충실히 기록했던 피가레타가 그의 최후를 그렸다. 그의 시체마저 유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스페인 인 부하들은 종 몇 개, 천 몇 조각을 내밀며 원주민과 협상을 시도하다 잘 풀리지 않자 그저 뱃머리를 돌려버렸다. 그의 시체를 누가 어떻게 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후의 우여곡절 또한 흥미롭기 그지없다. 마젤란의 노예였던 엔리케는 마젤란의 유언에 따라 자유를 되찾아야 했지만, 서구인들이 그냥 놓아줄 리가 없었다. 엔리케는 세부의 원주민 왕과 함께 책략을 짜서 서구인들을 급습하고 그들을 쫓아내버린다. 출구를 찾지 못한 함대는 반 년 가까이 동남아시아 바다를 헤매다 겨우 티모르 섬에 상륙한다. 두 척의 배 중 한 척이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100명의 선원 중 50여 명이 먼저 스페인의 세비야로 떠나기로 한다. 그 배의 함장의 이름은 델 카노. 그는 마젤란에게 대항했던 반란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와 별도로 델 카노의 항해 역시 항해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말라이 제도에서 세비야까지 단 한 번의 상륙도 없이 주파해야 하는 역사적인 항해. 다섯 달의 항해 끝에 결국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 베르데 곶에 도착했을 때 생존자는 47명의 선원 중 31명, 원주민은 19명 중 단 3명이었다. 국적을 가장하고 물자를 보충하려다 들켜 31명 중 13명의 선원이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이 18명의 선원만이 유럽으로 돌아왔다.(티모르 섬에 머무르던 50명의 선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 전멸했다.)


기록자 피가레타는 베르데 곶에서의 체류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육지는 목요일이라는데 배에서는 수요일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폰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기원전 400년 경에 가설로 세웠던 주장이 이제 정확한 관찰을 통해 증명된 셈이었다." 바로 지구가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자전한다는 사실 말이다. 


"사반 세기 동안 인류는 수천 년 전보다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덩어리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일생에서 이러한 변천을 경험할 수 있었던 행복한 세대는 이제 새로운 시대, 근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313쪽)

"그의 명성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라면 다른 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이념을 위해 수천, 수십 만의 목숨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이다."(325쪽)


유럽으로 돌아온 옛 반란자들은 마젤란의 업적을 철저히 숨기고 깎아내렸다. 이탈리아 청년 피가레타(이 청년도 참 재밌다. 명예도 부도 목적이 아니었고 그저 탐험을 위해 마젤란의 함대에 합류한 귀족 출신 청년인데, 심지어 수영도 못 했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는 '기록하는 자'였다.)만이 마젤란을 기억했다. 그는 돌아온 유일한 함장, 당시 유럽에 세계를 일주한 남자로 알려진 '델 카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그저 돌아온 자들 모두를 일컬어 '우리'라고만 불렀다. 이 반란자들은 마젤란의 일지와 피가레타의 일지도 모두 없애버렸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일지를 축약한 피가레타의 탐험기뿐이다. 




마젤란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출판사
자작나무 | 1996-11-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불멸의 탐험가 마젤란의 흥미진진한 기행기.미지의 세상을 향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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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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