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 김근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868년)


언젠가 과묵하고 소박한

가난한 기사가 살았네. 

우울하고 창백해 보였으나

대담하고 강직한 기사였네.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환영을 기사는 보았네.

씻을 수 없이 깊은 인상이

그의 가슴속에 새겨졌네.


그 순간부터 영혼을 불태우며 

기사는 그 어떤 여인에게도 무심하여,

무덤으로 가는 날까지

한마디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네.


기사는 목도리 대신 목에다 

묵주를 걸고 다녔고

얼굴에는 강철 투구를 쓰고

그 누구 앞에서도 벗지 않았네.


순수한 사랑에 충만하고

달콤한 꿈에 젖어

기사는 방패에다 자신의 피로 

A. M. D. 라고 새겨 넣었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광야에서

말을 탄 용사들이 바위 틈을 헤치고

싸움터를 향해 가며

소리 높여 숙녀들의 이름을 외쳤네.

<하늘의 빛이여, 성스런 장미여! Lumen coeli, sancta Rosa!>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우리의 기사는

이렇게 외쳤고 벼락 같은 그의 고함은

무슬림들을 패퇴시켰네.


머나먼 자기의 성으로 돌아온

기사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광인처럼 줄곧

말없이 우수에 젖어 죽었네. 

- '가난한 기사', 뿌쉬낀, <중세의 장면들>(1835>에서 발췌, <백치>(열린책들) 387~389쪽에서 재인용. 


상, 하로 나뉜 장편소설. 열린책들 양장본으로 950쪽. 1쪽 당 28행. 보통의 신국판 단행본보다 4~5행이 더 많다. 1행 당 글자 수는 30.5자. 1~2자 차이가 날 뿐이다. 즉, 한 쪽 당 글자 수가 보통의 신국판 단행본보다 꽤 많다는 것. 


몇 년 전 군대에 있을 적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전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저자의 소설이 대부분 그런 느낌이다. 매번 반하고 만다. ... 도스또예프스끼만큼은 가능한 전작을 해봐야겠다." '가장 건전한 방식의 자위: 도스또예프스끼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 전작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소설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제발트, 카버, 도스또예프스끼. <분신, 가난한 사람들>과 마지막 작품이자 최고의 소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까지 읽었다. 그리고 또 다른 대작, <백치>. 


원서에도 등장인물 소개면이 따로 있는지 모르겠다. 백치 미쉬낀 공작,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여인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 그녀를 사랑하는 청년 로고진, 당대 러시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 예빤친 장군,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에서 미쉬낀과 니꼴라이 못지않게 선한 인물로 그려지는 그의 아내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 그녀의 세 딸들과 그중 막내 아글라야,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추락한 인물의 전형 이볼긴 장군, 아내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그의 아들 '똑똑하지만 평범한 인간' 가브릴라, 딸 바르바라, 막내아들 '선량한' 니꼴라이. '활동가가 되고 싶었던' 아마추어 법률가 레베제프, 니꼴라이의 친구 '무신론자' 이뽈리뜨. 여기까지가 주요 인물이다. 그밖에 일곱 명의 인물이 더 소개되어 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도 다소 그렇지만, <백치>는 확실히 장황하다. 일화가 더 산만하게 전개되고, 사건의 흐름이 더 자의적이고, 작가의 마음대로 뚝뚝 끊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요 장편 소설은 대부분 그가 40-50대였던 19세기 중반에 집필되었다.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부터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인기 작가였던 그는 만년에 들어 도박에 중독되다시피 했고, 전 유럽을 떠돌며 도박 빚을 감당하지 못해 원고료를 먼저 받고 서둘러 소설을 쓰곤 했다. <백치> 집필 당시 작가의 형편이 더 엉망이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따름. 


하지만 이 작품 역시 그의 소설답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사건, 인물이 물씬 풍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읽을 때 당시 러시아 사회에 대한 이해와, 작가 본인의 사상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19세기 중반 러시아는 대강 말하자면 극단적인 혼란의 시대라고 해도 되려나. 이러한 혼란은 20세기 초반 러시아혁명 직후까지 내내 이어진다. 프랑스를 필두로 유럽 각지의 절대 왕정들은 이미 공화정, 의회 민주주의 혹은 프로이센처럼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갖춘 왕정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럽의 강국 중 하나였지만, 몇몇 왕들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도입되어 뻬쩨르부르그에도 공장이 들어서고 근대적 의미의 임노동자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왕정의 귀족 관료들은 부패한 데다 무능했고, 급변하는 유럽의 사상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지식인들은 그 괴리에 고뇌했고, 도시 인민의 가난은 참혹해서 도스또예프스끼 소설 전반에 '돈'과 '가난'이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다. <죄와 벌>,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까지,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든 추악함은 대부분 ‘돈’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정말로 1백만 루블이 끼어들고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열정이. 추악한 열정 말이야, 그래, 벌써 그 악착 같은 열정의 냄새가 풍기고 있는 것 같아. 알다시피 그런 작자들이 무언가에 한번 미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법이야!" 54쪽


"하지만 공작, 이 시대에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알아 주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어디서 돈을 구하지요? 그것 좀 물어봅시다." 475쪽


도스또예프스끼는 젊을 적 사회주의 청년 써클에 잠깐 몸담았다. <백치> 전반부에서 등장하듯 이 일로 인해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대에 선다. 황제의 계획에 따라 처형 직전에 명령이 철회되고 그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유형지에 들고 갈 수 있는 책은 성경이 유일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어떤 사회주의 지식인보다, 그 어떤 소설가보다 더 러시아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상, 낙후한 행정 체계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야망을 펼치지 못하는 청년들의 고뇌, 수시로 일어나는 믿기 힘든 살인 사건, 도덕과 윤리가 사라진 듯한 사회상 등을 그려냈다. 그러나 그가 이 비참한 시대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종교’, 그리스도적 인물의 등장, 개인이 스스로 변화함으로써 얻는 구원이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 막내 알료샤, <백치>의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타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무한한 연민과 동정으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내던지는 인간.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도 그 여자, 소피아였나, 그 여자를 통해 마지막에 가서 구원받는 것으로 그려졌던 것 같고. 


그의 해답에 동의하진 않지만, 그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뻔한 ‘분석’과 ‘해답’을 비난하며 인간의 내면을 낱낱이 파헤치고 보여주는 대목들은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작품 전반에 깔린 기괴한 열정, 광기, 파탄을 향해 질주하는 인물들, 정돈되고 깔끔하며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소설 속 장면들. 인간사의 모든 추악함. 시대와 사회의 혼란을 한 소설 안에 모두 담아내지만,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갈등하고 고뇌하고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돈, 질투심, 열등감 같은 것.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이런 점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보다 다소 산만하고 장황하기는 하지만 <백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 안엔 인간 삶의 모든 부정(어둠, 고통, 그러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 - '악'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 신앙과 종교, 가족, 사랑, 질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 맏이 드미뜨리의 불행과 고통은 '돈' 때문에 증폭되었고 그를 구렁텅이로 이끌었다. 단지 '돈' 때문에. 그 삼천 루블, 오늘날의 한화로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삼천 루블 때문에!” http://gomacoma.tistory.com/532


“거기엔...... 거기엔, 형제, 지금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거야. 다시 말해서 어떤 아름다움에, 여자의 육체에, 혹은 여자 육체의 한 부분에 빠져 들게 되면(색마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지) 자기 친자식이라도 갖다 바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심지어 러시아와 조국까지도 팔아먹게 돼. 그래서 정직했던 사람도 도둑질을 하게 되고, 온순한 사람도 살인을 하게 되며,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변심을 하게 되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열린책들), 149쪽.


또 하나의 흥미로운 주제는 평범함과 개성의 문제. 가브릴라를 통해 이 문제를 보여준다. 개성에 대한 이야기. 근대적 개인에 대한 이야기. 얼마 전 읽은 강상중 선생의 책 <살아야 하는 이유>에서도 현대 선진국 자본주의 사회 시민들의 불행과 고통의 근원 중 하나로 감당하기 힘든 개인의 무게, 근대적 자의식의 탄생을 들었다.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나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는 보통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이 시대의 인간과 종족에게 그보다 더 모욕적인 말은 없어요. 말하자면 독창성이 없고, 성격이 약하고, 별다른 재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평이지요. ... 그래서 차라리 돈이라도 챙기자는 생각에 도달한 거지요. 돈을 벌면 그야말로 최고로 독창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 196쪽


"현실 속에는 인물들의 전형성이 물에 탄 듯 묽어져 있다. 그러나 온갖 부류의 조르주 당댕과 뽀드꼴료신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들은 매일같이 우리 앞에 얼쩡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약간은 희석된 듯한 기분이 든다. ... 지성은 있되 본인의 사상은 없다. ... 이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틀에 박힌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행복하다. 틀에 박힌 '평범한' 사람은 자기가 비범하고 독창적인 인간이라고 가장 편안하게 상상함으로써 아무런 심적 동요 없이 흡족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708~710쪽


"가브릴라는 끊임없이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자각해 왔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가장 독창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다." 712쪽


그 시기의 역사를 미리 공부하고 소설을 읽으면 훨씬 더 재밌고, 생생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몇 년 전 19세기 프랑스혁명사에 이어 20세기 러시아혁명사를 열심히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이 공부가 뜻하지 않게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생각도 뒤늦게 든다.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나는 도스또예프스끼를 비롯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러시아 지식인들의 고뇌에 대해 이야기했다. ‘러시아적’이라는 표현을 두고 누군가는 허황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랄산맥 서쪽의 러시아는 19세기 서유럽의 발전, 계몽주의, 근대를 목도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비참한 가난을 영위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쪽 저편에는 아시아에 포함되는 광활한 대지, 미개하고 찢어지게 가난하면서 자족적인  수많은 농노들이 있었다. 러시아, 이 나라는 도대체 무슨 나라인가? 러시아적인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는 아시아인가, 유럽인가? 더구나 서유럽과 종교마저 달랐으니, 나는 이 지식인들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되게 읽었지만 보람이 있다. 




백치(상)

저자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백치』상권. 고전들을 젊고 새로운 얼굴로 재구성한 전집「열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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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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