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 지음 | 김화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 원작 1994년


카뮈의 마지막 소설, 미완의 유작. (방금 페이스북에서, 4월에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쓰이지 않은 뒷부분을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하다.) 이 작품의 원고는 사고 당시 까뮈가 매고 있던 가방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후 30여 년이 지난 뒤에 까뮈의 딸 카트린 카뮈에 의해 묶여 책으로 나왔다


책 말미에는 원고와 함께 그가 남긴 짤막한 메모들이 실려 있다. 본문 곳곳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주석이 a, b 등의 기호와 함께 각주로 들어가 있다. 책을 훑어보기만 했을 때는 굳이 미완의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했었다. 친구들과 하는 독서모임에서 고른 책이라 탐탁지 않은 마음을 추스리고 사 읽기 시작했다. 그랬는데, 

역시 까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그지, 내가 좋아하는 까뮈 맞지. 오히려 미완이어서, 구성과 문장에 대해 그가 남긴 메모들이 흥미를 돋우었다. 예를 들어 이런 각주. "b 책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과 살의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도록 해야 될 것이다."(115쪽) 그리고 책 말미의 이런 메모. "2차적 의미의 저 순진성을 통하여 고대 그리스 인들의 위대함 혹은 러시아 대가들의 위대함을 되찾을 것. 두려워하지 말 것.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 것... 그렇지만 누가 와서 나를 도와줄 것인가?"(322쪽, 부록2 최초의 인간(노트와 구상)). 

이 책에는 2부까지만 그나마 완성된 형태로 실려 있는데, 아마도 내 생각에는 4부 내지 5부까지 쓰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만큼 넓은 무대를 예비하고 있다. 소설 속 무대는 알제리, 까뮈의 고향. 편집 전 원고인 이 작품에는 까뮈의 유소년기의 풍경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여러 인물들의 이름, 지명, 동네 시장과 골목, 학교의 풍경, 까뮈 본인의 어머니처럼 작품 속 어머니 역시 청각장애인이었고, 까뮈 본인의 아버지가 그랬듯 작품 속 주인공의 아버지 역시 1차대전 중 유럽 본토에서 사망했다. 주인공 코르므리 역시 까뮈 본인의 옛 모습을 많이 닮은 듯 보인다. 


아주 재밌게 읽어나갔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연상하게 하는 테마. 알제리는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독립했고, 독립 전쟁 당시 알제리가 고향이었던 백인 프랑스인 까뮈는 알제리 독립국 건설을 위한 무장 투쟁에는 반대했었다. 위키피디아의 알베르 카뮈 페이지에는 그가 단지 '알제리계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했으며,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는 발언을 근거로 그의 입장을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듯한 어조로 쓰여 있다.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 적어도 <페스트>를 비롯해 몇 편의 작품을 읽어본다면, 그의 입장을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텐데, 라고 나는 단지 추측한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전쟁, 전쟁이 남길 양국 간의 갈등과 적대심, 알제리 본국의 정치경제적 형편 등등. 어디서나 '비둘기파'는 욕 먹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비둘기파들이야말로 더 인간적인 고민과 내적 갈등을 안은 사람들이었을 거라 상상하는 쪽이다. 어느 시대의 어느 무대든 간에.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데, 알제리는 1830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 속 그려진 바에 따르면, 19세기 내내 이어졌던 혁명과 봉기의 기억을 안은 사람들이 알제리로 떠났다고 한다. 1870년 파리 꼬뮌의 기억을 안고 있던 저항자들이 알제리라는 낯선 땅에 도착해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과 싸우며 자신들의 삶을 일구어나갔던 역사. 까뮈 본인의 선조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의 땅을 빼앗았던 과거. 


그러나 솔페리노가 1848년 2월 혁명파들이 와서 세운 고장이고 보면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정말이라니까요. 우리 증조부 증조모도 그랬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감한테 어딘가 혁명 당원 같은 데가 있는 거예요.' 192쪽

... 혹은 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독일의 지배를 거부하고 프랑스를 선택한 저 알자스 사람들처럼.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죽었거나 감옥에 갇힌 71년의 반란자들에게서 뺏은 땅이 주어졌다. 199~200쪽

마치 인간들의 역사가, 가장 해묵은 대지 위를 끊임없이 전진해 가고 나서 그렇게도 보잘것없는 흔적들만을 남겨 놓은 그 역사가, 기껏해야 발작적인 폭력과 살인, 갑작스러운 증오의 폭발, 그 고장의 강들처럼 갑자기 불어났다가 갑자기 말라 버리는 피의 물결이 전부였다가, 그 역사를 진정으로 만든 사람들의 추억과 더불어 끊임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모두 증발해 버리듯이 말이다. 202쪽


이런 테마가 나를 사로잡은 주된 이유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오웰의 모든 작품 중에서 <카탈로니아 찬가>를 가장 좋아하고,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의 장면들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열렬한 이념주의자의 전력을 품은 소시민이니까. 앞으로도 이런 테마들, 역사의 딜레마에 처한 개인, 그의 선택과 결단, 무엇을 선택하든 생길 수밖에 없는 슬픔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개인, 그의 나머지 삶을 평생 지배할 무거운 상실, 슬픔, 비탄 같은 것에 매혹되리라는 예감. 미완의 메모 속에서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들의 이름이 보이고, 주인공 코르므리와 주고받는 대화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작품 집필 당시에 가장 뜨거운 현안이었던 알제리 식민지 문제, 식민지 독립 투쟁에 관한 각자의 입장, 그에 따른 선택, 그로 인한 갈등 같은 문제를 쓰지 못한 뒷부분에서 다룰 생각이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두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던 장면은 다음과 같은 대목들. 


그러나 몇 발자국 더 걸어가다가 아이는 그의 조그만 손을 삼촌의 단단하게 못이 박인 손 안에 밀어 넣었고 삼촌은 그 손을 아주 힘차게 꽉 잡았다. 123쪽

젊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우정이나 항구적인 감동 같은, 그들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적게 요구할 수 있다. 가령 아무 말 없이 같이 있어 주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감동, 우정, 고상한 행동이 내 눈에 그 기적 같은 가치를 온통 다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은총의 완전한 효과. 298쪽


실제로도 그랬을 벙어리 삼촌 에티엔과의 우정, 초등학교 시절의 베르베르 선생님이 보여준 믿음. 까페에서 책을 읽다 이 대목들에서 나는 정말 눈시울이 붉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단단한 껴안음, 악수 같은 것, 한 아이에 대한 칭찬, 쓰다듬 같은 것이 마음을 콱 뭉치게 만들어서, 울컥했었다. 

역자가 말하듯 작품 속 문장은 끊일 듯 끊이지 않으면서 몇 줄을 잇는다. 하지만 제발트의 그 만연한 문장과는 다르게 까뮈의 문장은, 물론 김화영 선생님의 솜씨 탓도 있겠지만, 이해되지 않고 애매한 구석 없이 명료하게 제 할 말을 하며, 하나의 문장 안에서 점차 고조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까뮈는 아마도 낭만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혐의가 짙어졌다. 시대가 그렇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고민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작품 속 주인공 코르므리가 그랬듯 까뮈야말로 맨손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더 많은 앎을 찾아 바다 건너 땅으로 홀로 건너온 인간이기도 했으니까. 브레송의 사진 속 모습이 그렇듯.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열심히, 침 튀어가며 치열하게 말하고 쓰고 논쟁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 


그는 혼자서 배우고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채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 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할, 타인들과 여자들에게로 또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203쪽


낭만적이라는 말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옮겨도 좋겠다. 이런 문장들 하나하나가. 


'용서를요?' 하고 코르므리가 말했다. "당신한테 모든 은혜를 다 입었는데요." "아닐세, 내게 은혜 입은 건 별로 없어. 단지 자네의 애정에 대해 때로는 응해 주지 못하게 되는 나를 용서해 달라는 것뿐일세..." ... "나의 내면에는 끔찍한 공허가, 가슴 아픈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어서..." 45쪽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할머니가 아들을 육체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에르네스트의 아름다움과 힘에 끌리고 있다는 것을, 그의 앞에서는 평소와 달리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따지고 보면 아주 흔한 현상이며 그 약해지는 마음이 바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하고 이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임을, 그것은 아름다움 앞에서 약해지는 마음 바로 그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126쪽

그들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다만 그들이 서로에게 자신들이 빠져 있는 옹색하고 잔혹한 궁핍의 대표자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133쪽

자기가 때린 사람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자 돌연 어떤 어두은 슬픔의 감정으로 그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이리하여 그는 남을 이긴다는 것은 남에게 지는 것 못지않게 쓰디쓴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64쪽

(일생 동안 그를 울게 한 것은 선량한 마음씨와 사랑이었지 절대로 악이나 학대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그의 마음과 결심을 더욱 굳혀 주었다.) 178쪽

오늘 오후 그라스에서 카느로 가는 길 위에서 어떤 믿을 수 없는 열광 속에서, 그리고 여러 해 동안의 관계를 맺어 오고 난 뒤에 돌연 그가 제시카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침내 사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리하여 이 세상의 그 나머지 것은 그녀에게 비긴다면 그림자 같은 것으로 변할 때. 322쪽

요컨대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오직 그 이야기만을. 심오한 기쁨. 334쪽


찢어지게 가난한 한 소년의 앎의 세계가 탄생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먼 시대 먼 나라의 또 다른 독서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고. 


그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벌써 그가 앉아 있는 방은 어둠 속에 잠기고 그의 동네 자체와 그곳의 소음, 도시와 세계가 모두 지워져 버리는 것이어서 미친 듯한 열광 및 탐욕과 더불어 독서가 시작되는 즉시 그 모든 것들은 완전히 사라지면서 아이는 완벽한 도취경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무엇을 시키려고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불러도 아이는 도무지 거기서 헤어나질 못하는 것이었다. 256쪽

그녀 역시 냄새를 맡아 보았고 때로는 책이란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잘 알아보아야겠다는 듯이,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자기 아들이 그렇게도 자주 여러 시간 동안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삶을 발견하고 마치 모르는 여자를 보듯이 그녀에게 그 이상한 눈길을 던지며 되돌아 나오는 그 신비스러운 기호들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는 듯이, 빨랫물에 곱은 주름진 손가락으로 책장 위를 쓸어 보기도 했다. 257쪽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좋아했을 게 틀림없는 작품. 하지만 미완인 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최초의 인간

저자
알베르 카뮈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최초의 인간』은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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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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