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 서성철 옮김 | 까치글방 | 2012년 (원작 1992년)


요 책도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모임이 모임이다 보니 이런 볼륨 있는 책들을 읽을 일이 생긴다. 신국판 크기의 472쪽인데, 글씨가 꽤 작다. 대신 컬러 도판이 풍부하다.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여러 화가들의 그림, 조각과 건물의 사진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BBC 다큐를 토대로 해서 멕시코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쓴 라틴 아메리카 통사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기록된 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의 상륙 이후부터이다. 그래서 1492년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자가 아닌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금까지 국내 번역된 라틴 아메리카 통사들은 대체로 1492년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를 신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때로 제국의 행정 체계와 권력 구조 등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는 정도로 그쳤다. 현재는 1492년 이전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이 많이 진전된 상태라고 한다. 한편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통사라고 한정지어 말하기 힘들다. 스페인 통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통사답게 1부의 제목은 '성모와 황소'이고, 1장의 제목은 '태양과 그림자'이다. 1장에서는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정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투우, 탱고 등을 들어 서술한다. 엄격한 역사서를 기대했다면 이런 시작이 뜻밖일 것이다. 전문 역사가가 쓴 책이 아닌 까닭에 인과관계에 대한 엄격한 분석, 1차 사료 검토 등은 부족한 편이다. 하지만 보통의 독자의 입장에서는 유려한 서술과 화려한 문장이 더 흥미진진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신세계의 정복이라는 사건 (...)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강간되는 것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관찰자이고,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잉태를 구성하는 모순된 잔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증인들이다."(16쪽) 


푸엔테스의 목적은 간단명료하다. "이 책의 목적은 스페인계 세계의 경제와 정치의 불일치와 분열에 대해서 알리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문화의 지속성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9쪽) 어떻게 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몇 가지 전통과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풍성한 예술적 성취에, 독립 이후 라틴 아메리카가 겪어온 비극을 대비한다. 왜, 어떻게 해서 라틴 아메리카는 안정된 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사회 구조를 뿌리 내리지 못했는지 탐구해보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은 존재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결국 문화의 창조는 정치와 경제를 창조한 바로 그 사람들 - 공공시민, 즉 시민사회의 일원들 - 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문화는 그 자체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 삶과의 일체감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는가? 우리들은 다가오는 세기, 문화의 통일을 기반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와 경제의 통합을 끌어낼 수 있는 우리들 삶의 세 요소를 통합할 수 있는가?"(388쪽) 


길지만 흥미로운 여정이다. 특히 이 책에서 흥미진진한 부분은 갖가지 예술과 문화적 성취에 대한 서술이다. 711년 이슬람인들이 발을 들인 이후 수백년 동안 스페인에는 이슬람과 기독교 왕국이 공존했다. 1492년 기독교인들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가 마침내 종료되기까지 이슬람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적대하고 전쟁을 벌였지만, 때로 각자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기도 했다.(이언 아몬드의 <십자가 초승달 동맹>이 바로 이 주제를 다룬다.) 당시의 유럽 전역을 통틀어 가장 풍성하고 다양한 문화, 예술적 성취의 토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붕괴는 예술의 승리로 인해서 보상받았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한 편에는 펠리페 2세, 종교재판소, 무적함대, 유대인과 무어인, 그리고 개종자의 추방, 펠리페 3세의 총신정치, 펠리페 4세의 방탕, 백치왕 카를로스의 무능이 있었다. 또 다른 한 편에는 <돈 키호테>, 성 후안 데 라 크루스, 성녀 테레사, “시동녀들”, <인생은 꿈>, 돈 후안, 엘 그레코가 있었다."(235쪽) 몇몇 장의 경우는 해당 시기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예술 및 문화에 대한 뛰어난 단편들이다. 


공부하며 읽을 생각이 아니라면, 즉 뚜렷한 목적을 갖고 읽는 것이 아니라면, 역사책의 수많은 디테일들에 굳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 저자의 핵심 메시지와 책 전반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면서 마음 편히 읽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통독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마음을 끄는 몇몇 지점들을 유념해두면 된다. 대체로 그 지점들은 독자가(내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관련된 것들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다음의 몇 가지였다. 먼저 로마의 스페인 정복과 지배가 스페인에 남긴 유산. 로마가 몰락한 이후로 스페인에는 행정 체계, 단일한 가치관 등을 찾아볼 수 없는 사실상 야만의 역사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로마의 빈 자리를 가톨릭이 일정 정도는 대체했으나, 이슬람의 정복 이전까지는 단일하고 강력한 권력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스페인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뿌리 깊은 가톨릭 전통의 한 기원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며, 법과 행정을 포함한 단일한 지배의 원리(혹은 체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모두가 늑대가 되느니 한 마리의 늑대만 남겨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늑대를 텍스트로 속박한 것이 바로 현대의 입헌 국가들이다.) "711년의 이슬람교도에 의한 침략 전, 그리고 1492년 이후의 스페인 자국에 의한 아메리카-인디오 세계의 정복 이전까지 로마는 스페인 정복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오랜 기간에 걸쳐서 최고의 경험이 되었다. 그것은 정말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이 원주민의 문명을 교묘한 방법으로 짓밟고, 그 문명의 싹을 잘라버리고, 좋은 것과 나쁜 것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한 문화의 고유한 형태를 다른 것으로 과격하게 대체했다면, 종주국 로마가 그의 식민지 스페인에 주었던 경험은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스페인에 유기적이고 영속적인 정부와 공공기관을 수립했다."(40쪽)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엇보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고야, 호베야노스, 시몬 볼리바르, 에밀리아노 사파타 같은 사람들. 이전에 <아마존>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개별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해당 시기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 손쉬운 동기가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고야의 그림과 생애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국내 번역된 고야에 관한 책들을 서점에서 모두 살펴보았다. 도판과 화가의 생애, 생존 시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가장 적절하게 섞인 책으로 마로니에북스의 <고야>(로제-마리, 라이너 하겐 지음)을 골랐다. 다 읽고 아직 쓰지 못해 책상 위에 쌓아둔 상태다. 


▼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The Sleep of Reason Produce Monsters.”, 동판화, “카프리초스” 중에서.


푸엔테스의 해설과 인용을 통해 만난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지도자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는 보기 드물게 현명한 지도자,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볼리바르의 지성의 편린은 그의 자조적인 유머에 있었으며, 그의 과장된 진술 한 편에서 보이는 익살스런 자기비판적 태도는 그의 균형 잡힌 감각뿐만 아니라, 숙명과 비극적 실패에 대한 깊은 인식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세 명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 키호테,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나이다.” 307쪽

전제정치로 갈 것이냐, 아니면 무정부상태로 갈 것이냐? “불가능한 것은 바라지 맙시다. 자유 위에 올라섰다가 다시 독재정부의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절대적 자유는 언제나 절대권력으로 전락합니다. 이 두 경계 중간에 바로 가장 높은 사회적 자유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균형에 도달하기 위하여 볼리바르는 인종적인 불평등이 횡행하는 그곳에 “효과적인 전제주의”, 즉 법적인 평등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행정기관을 제안했다. 313쪽


하지만 볼리바르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소수의 지주들의 지배 아래 수많은 인민들은 신음했으며, 멕시코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1879~1919)와 판초 비야 같은 무장 혁명가들을 낳기도 했다. 마르코스로 유명해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이름도 사파타에서 유래했다. 독립 이후 라틴 아메리카가 겪어야 했던 문제이기도 한 딜레마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파타의 운동은 지극히 정당했지만, 그것은 결국 국가의 문제로 수렴되어야 했다. 


국가적 혁명은 지방적 혁명과 대결했다. 후자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공통의 전통기반에서 수립되었다면, 전자는 진보를 위한 국가적 계획을 입안하여 그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파타주의는 문제가 생기면 즉각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지방의 관습에 근거한 윤리관은 단순하고 명쾌하여, 한번 내려진 결정은 취소될 수 없었다. 또 그 문화가 동질적이고 전원이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반면에 국가적 혁명은 서로 이질적인 사회를 번영시키기 위해서, 통신 수단이나 전력이나 행정능력이 없는 나라에 근대적인 사회간접자본을 창출하여 한 나라의 모든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모렐로스 주의 혁명은 국제관계에 무관심해도 좋았지만, 국가의 혁명은 북아메리카 대국의 끊임없는 압력과 외국의 개입이라는 명백한 위협에 또다시 맞서야만 했다. ... 

이리하여 혁명은 진정되어야 했고, 지방의 게릴라 지도자들도 제거되고 국내의 문제에 대한 법적, 정치적 타협이 모색되어야만 했다. 이제 비극이 시작되었다. 377쪽


결국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긴 궁금점은 이런 것이었다. 푸엔테스가 말하는 ‘문화’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스페인의 오랜 역사와 인디오의 삶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 속에 지방 자치 직접 민주주의 전통이 존재하며, 근대화 이후의 지식인들은 이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외면한 채 산업 발전과 근대화라는 서구의 유산에만 집착했다고 말한다. 한편 정치와 사회의 오랜 정체와 비극을 위로하면서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예술이 오랜 융합과 소화의 역사를 훌륭하게 증명하고 드러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푸엔테스가 말하는 '문화'는 수많은 죽음과 인민, 한마디로 ‘역사’가 응축된 현재의 정신 유산을 말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런 문화에서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개선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엄격한 사료와 분석으로 뒷받침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간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역사를 읽는 일은 내게 평온함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이 두꺼운 책들을 읽고 마침내 쓰고 난 순간, 아주 아주 뿌듯해진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까치글방 132)

저자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출판사
까치 | 1997-08-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통시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인류의 유년기인 알타미라의 동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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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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