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2

Benim Adim Kirmizi(1998년)

오르한 파묵 장편소설 |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지인 중에 파묵 덕후가 있어, 파묵? 파무욱? 파무우우우욱? 뭐 그런 마음으로다가 덜컥 두 권을 사서 읽어보았다. 각 권이 300쪽이 넘고, 큰 이야기이며, 등장인물의 수도 적지 않다. 이렇게 두껍고 장대한, 이국의 옛 역사를 무대로 한 소설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은 이유가 잘 가늠이 안 된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소설의 무대이고, 복잡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의 구석구석이 소설 속에서 그려진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뒤로도 한동안 중세 유럽을 압도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오스만 제국의 대포 제작 기술은 유럽과 비슷했다(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2장). 하지만 유럽이 새로운 기계와 기술에 열광하며 대포와 범선으로 세계의 대양을 지배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과 명나라, 청나라는 실용성과 실리주의, 수공업 기술과 과학을 천대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유럽이 만들어낸 자동으로 움직이며 시간을 알리는 기계식 시계는 오스만 제국과 중국의 귀족들에게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치폴라, <시계와 문명> 2장). "그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마치 신의 창조물인 것 같았습니다."(<내 이름은 빨강 2>, 347쪽). 


소설은 두 문명의 이런 변화와 접촉을 이야기의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오스만 궁정의 세밀화 화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두고 추리 소설처럼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살인 사건에는 오스만의 전통적 화풍과 유럽의 새로운 화풍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스만 세밀화가들의 고뇌와 질투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고, 거기에 연인들의 사랑, 또 질투 같은 것이 엮여 있고, 하여간 복잡한 이야기다. 이어지는 이야기와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정작 그게 핵심은 아니다. 미학, 특히 회화와 관련해서 현상과 본질 같은 것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정말로 흥미로운 소설일 거다. 나는 어떻게든 다 읽겠다는 마음으로 붙잡고 읽었다. 


정작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본문 글씨체였다. 출판사마다 본문 명조체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어느 글씨체가 특별히 이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책을 백 쪽, 2백 쪽 읽어 나가면서 이 글씨체가 정말로 이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도 같은 글씨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직접 확인한 민음사의 몇몇 인문.사회.과학서들은 같은 글씨체를 사용한 것 같다. '모던 클래식' 총서의 첫 번째 책이 <내 이름은 빨강>인데, 이 총서의 판형도 참 마음에 든다. 신국판 변형으로 신국판보다 조금 작다. 본문 종이의 질감도 참 좋았다. 무슨 종이 썼는지 궁금하다. 


아마 파묵을 다시 읽을 일은 없겠지? 

말이 괜히 슬프네. 


술탄 앞에서 시합을 벌인 두 명의 의원 가운데 분홍색 카프탄을 입은 한 명이 코끼리를 죽일 만큼 독성이 강한 초록색 알약을 만들어서 푸른색의 카프탄을 입은 다른 의원에게 주었다. 푸른색 카프탄을 입은 의원은 먼저 독이 든 알약을 먹고, 곧바로 푸른색 해독제를 꿀꺽 삼킨 다음 달콤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그가 경쟁자에게 죽음을 맛보게 할 순서가 되었다. 푸른색 카프탄을 입은 의원은 천천히 분홍색 장미를 꺾어 입술에 갖다 대고는 장미꽃 속에다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어둠의 시를 속삭였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하게 분홍색 카프탄의 의원에게 장미 향기를 맡으라고 내밀었다. 분홍색 카프탄의 의원은 장미 안에다 속삭인 시의 힘이 너무나 두려워서, 향기 이외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그 장미가 코에 닿자마자 겁에 질려 죽고 말았다. 2권, 124쪽


책은 우리의 슬픔에 스스로 위안이라고 착각하는 깊이를 더해 줄 뿐이다. 2권, 231쪽





내 이름은 빨강. 1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1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스탄불을 무대로 펼쳐지는 음모와 배반과 사랑!2006년 노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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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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