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Post Office(1971년)

찰스 부코스키 지음 |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복잡한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서서비행>의 금정연 작가가 부키 출판사의 <아까운 책 2013>에서 이 책을 꼽았다. 부코스키의 다른 작품 <팩토텀>과 함께 서평을 쓰기도 했다. 


주인공 치나스키는 술 먹고 섹스하고 경마하는 남자다. 죽도록 싫지만 돈이 없어 우체국에 출근하고 덜떨어진 상사들과 싸운다. 나는 그가 별로 탐탁지 않다고 생각했다. 순 자기 자랑뿐인 것 같은 이 소설도 별로 탐탁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려고 다시 읽는 동안, 인정했다. 어려운 구석 하나도 없는 이 소설이 재밌다는 것, 우리가 이 남자에게 반한다는 것. 번역가 박현주 선생님의 옮긴이 후기가 (아마도) 그런 우리의 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쉽게 수긍하지 못한다. 자유로울 줄 아는 영혼이 나와 같은 노동의 세계에서 코피 터지게 고생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걸까?


어쩜 이렇게 첫인상이 안 좋은 표지를 썼을까 궁금했다. 읽어나가다 혹시 하고 짐작해본 것이 있다. 부코스키는 실제로 소설의 주인공 치나스키처럼 살았다고 알려져 있고,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자전적' 소설으로 광고되고 있다. 부코스키를 닮은 이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표지에 넣음으로써 소설 속 치나스키와 부코스키의 동일시(이름마저도 비슷하고)가 강화된다. 소설을 읽은 우리가 이 영웅의 이름을 기억할 때 '치나스키'를 떠올릴까 '부코스키'를 떠올릴까? 크게 중요하겠냐면서 '부코스키'라고 부르지는 않을까?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치나스키처럼 살았다고 '알려진' 부코스키의 반反노동적 삶이 그의 소설에 호감을 갖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친 건 확실하다. 미국의 원서 표지에는 부코스키의 얼굴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치나스키 같은 인간을 주위에 두었을 때 과연 그를 좋아할 수 있을까? 아니, 그가 우리를 좋아하기나 할까? (<레이먼드 카버>를 보면 부코스키가 카버네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술 먹고 깽판 쳐서 카버가 엄청 싫어했다는 대목이 있다.) 치나스키는 여자를 만나고 또 만난다. 여자들은 치나스키를 좋아하고 또 좋아한다. 치나스키는 이런 은근한 허세까지 흘릴 줄 안다. "나는 우연찮게 클래식 음악에 훤했는데 이른 아침 침대에 누워 맥주를 마실 때 듣는 음악이라곤 오직 그뿐인 덕이었다. 매일 아침 뭔가 듣다 보면 기억을 할 수밖에 없다. 조이스에게 이혼당했을 때 나는 실수로 <고전과 현대 작곡가들의 삶>을 두 권 짐 가방에 싸 들고 왔다. 이자들은 대부분 고통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게 즐거웠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음, 나도 지옥에 있는 건 똑같은데 곡 하나 못 쓰는군."(159쪽) 


우리는 좀 더 술을 마시고 침대에 들었지만 이전과 같진 않았다. 같을 수가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이 있었고,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쳐다보다 엉덩이 볼기 아래 잡힌 주름과 처진 살을 보았다. 불쌍한 것. 불쌍하고 불쌍한 것. 조이스의 몸매는 탄탄했는데. 손에 잡으면 감촉이 좋았다. 베티의 감촉은 좋지 않았다. 슬펐다. 슬펐다. 슬펐다. 베티가 돌아왔을 때 우리는 노래를 부르거나 웃지도 않았고 말싸움조차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이전처럼 내 발을 그녀의 몸 위에 올려놓지 않았고 그녀도 내 몸 위에 발을 올려놓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손도 대지 않고 잤다. 

우리는 둘 다 뭔가 빼앗겨 버렸다.(119쪽, 강조는 인용자)


위 인용문이 그렇듯 이 소설은 발췌하기 망설여지는 대목으로 수두룩하다. 하지만 나는 <여자들>을 읽고 <팩토텀>을 읽겠지. 


결국 이건 질투의 글이다. 




우체국

저자
찰스 부코스키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2-02-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없이 노골적이고 저속한 부코스키 작품 세계의 시작!미국 주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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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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