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 김위선 옮김 | 길 | 2013년 


역사책만 즐겨 읽는 독서가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 학교 다닐 적 사학과 강의를 들었을 때, 덥수룩한 머리에 안경 낀 복학생들이 옛 일을 시시콜콜 들먹이며 자신은 말해야만 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듯 이야기를 잇는 모습에 넌더리를 낸 기억이 있다. 

헌 역사가의 팬이 되어 그의 저작을 모두 읽게 되었다.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삶을 마감한 경제사학자의 책 중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모두 읽었다. 그중 한 권은 내가 작업한 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가 미시사가로 거론되는 이유는 한 사람 혹은 한 가문, 한 사건을 통해 당시의 전반적인 경제·정치 상황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묘사해 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맥락의 논제를 얘기하고자 항상 그는 한 사건이나 한 인물 혹은 소재 하나를 선택하여 이를 현미경으로 삼고 그 주변에 묻어나는 여러 요소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미시적 방법’을 택했다. 17쪽, 옮긴이 해제


또한 그는 역사가를 연극 연출가나 영화 감독에 비유했으며 역사가가 써내는 책을 연극에 비유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여주는 보통 연극 연출가와는 달리 그는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일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 이런 맥락에서 그는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책을 쓰는 데에 인간과 관련된 모든 학문,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을 접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쪽, 옮긴이 해제


역사학자로서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대포, 범선, 제국이나 『시계와 문명』을 읽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두 권 모두 그리 두껍지 않고, 아주 재밌는 (게다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이 어떤 내용인지는 아래 인용문이 잘 소개해 주고 있다. 


치폴라는 서문을 따로 쓰지 않고 생뚱맞게 이야기 세 개만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이자 테마는 바로 ‘상인’이다. 중세 초 상인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12, 13세기 유럽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이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고, 이후 산업혁명의 동이 트기 전까지 이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현대 유럽 문화에 무엇을 남겼는지 얘기하고자 한다. 

궁색하고 원시적인 상태였던 8, 9세기 유럽 대륙에서 살았던 상인은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무법자’(homines duri)였다. 그렇게 불린 이유는 당시 상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자만이 “가톨릭교회에서 퍼붓는 온갖 비난을 감히 무시하고 살았으며, 산길에 도사리던 수많은 위험과 죽을 고비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쪽, 옮긴이 해제


흥미를 돋우는 서술 방식과 구성에 더해 독특한 유머가 담겨 있다. 역사 전문서보다는 교양서 독자를 대상으로 쓴 산문의 느낌을 조금 풍긴다. 


가끔 자문해 보긴 하지만 그 해답을 찾기 힘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이 국가 혹은 저 국가의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자문해 본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국가의 문화 수준은 학교(어느 정도까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무엇을 가르치는가)와 병원 그리고 그 국가의 공중 화장실과 같은 공공기관의 질에 달렸다 생각하고 여기에서 해답을 찾곤 한다. 138~139쪽


책에 실린 옮긴이 해제가 매우 유용하다. 치폴라와 관련한 외국의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길게 쓴 글으로 치폴라의 생애와 학문적 이력, 관심사, 역사학자로서 가진 특징 같은 것을 잘 소개해 준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글을 쓴 역사학자로서 어떤 저작은 이탈리아어로 써서 영어로 번역판이 나왔고 어떤 저작은 그 반대의 순서였다. 따라서 저작들의 초판본을 확인하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옮긴이 해제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

저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출판사
| 2013-05-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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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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