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부의 서재 - 어느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임호부 지음 | 산과글 | 2013년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물론 책을 만드는 데는 저자나 역자도 있어야 하고 지업사나 인쇄소, 제본소에서 일하는 분도 필요하지만, 그들은 각각 책을 쓴다고 하거나 종이를 발주하고 책을 찍고 묶는다고 하지, 책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다. 오직 편집자만이 어디 가서 “책 만드는 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만든다’라는 말의 의미가, 도구를 통해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제작해낸다는 의미라기보다 정신 활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말하자면 좀 더 고차원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은 물론이다. 에디터로서의 편집자인 셈이다.”(「책 이야기」, 271쪽)


정확히 말하면 많이 읽는다기보다 오래 읽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다. 책을 읽는 일이 좋아서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았고, 그 결과 하루 종일 읽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읽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왜 특별히 내가 이 일로 월급을 받는지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다. 읽고 쓰는 데는 비교적 성실하니까, 정도가 내가 생각해 낸 구실이었다.
그러다 한 편집자의 페이스북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나와 같은 질문을 품게 된 그가 사장에게 편집자가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했던 사장은 여러 가지 중에서도 ‘원고를 잘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사무실에서 이 대목을 읽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원고나 글을 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잘 읽는 일이 가능하다면 더 잘 읽는 것도 가능하고 반대로 못 읽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읽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월급을 받는 이상,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잘 읽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결론도 가능하다.
출판사가 저자의 원고(초고)를 받으면 편집자는 원고를 읽으면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을 살핀다. 개인적으로 원고를 처음 읽는 이 과정에서 순전히 독자의 마음으로 통독하려고 한다. 몰입하되 전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만들어질 책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판형, 두께, 표지의 느낌, 본문의 모양도 틈틈이 그려 본다. 그렇게 파악한 것을 바탕으로 콘셉트를 잡고 교정 교열의 방향을 정한다. 예컨대 ‘이러한’과 ‘이런’, ‘되어’와 ‘돼’ 중 무엇이 원고에 어울리는지도 원고의 내용과 콘셉트를 바탕으로 고민하고 판단한다. 그다음 교정자가 원고를 읽으면서 편집자가 정한 방향에 따라 비문과 오탈자를 교정하고 내용을 교열한다. ‘외주 교정자’란 출판사 밖에서 프리랜서로 교정 교열을 하는 사람이다. 일반화하기는 힘들지만 큰 출판사에서 외주 교정자를 두고 일하는 경우가 많고 작은 출판사도 가끔 외주 교정자를 두고 작업한다. 
나는 짧은 이력 동안 외주 교정자와 함께 작업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편집자와 교정자의 두 가지 읽기를 혼자서 맡아 했다. 두 가지 읽기는 완전히 다르다. 내 생각에 두 가지 읽기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원고와 나 사이의 거리다. 몰입하면서 전체를 파악하는 읽기가 글의 흐름에 푹 빠지는 것이라면, 빨간 펜을 든 채 글자에 바짝 달라붙는 읽기는 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두 가지 읽기는 명확히 분리되어야 한다. “제가 교정을 보고 있는 책의 내용에 재미를 느껴서 몰입하게 되면 오히려 불안해져요. 반대로 원고 진도가 잘 안 나가면 내가 책을 ‘꼼꼼히 눌러 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지고요.” 글자에 바짝 달라붙어 교정을 볼 때는 저자의 말대로 “교정이 끝나면 그 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정자가 원고의 전체를 몰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일을 맡긴 편집자의 주문에 따르되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전체가 안 보이면 편집 의도에 맞게 차례를 짤 수도 없고 문장을 수정할 때도 확신이 안 들어요.”(“이모부를 부탁해”, 『기획회의』, 354호)
『이모부의 서재』는 부제가 밝히듯이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다. 제목만 봐서는 그저 서평집이구나 했을 텐데, 부제가 책의 독특함을 잘 담았다. 저자가 4년 동안 블로그에 쓴 글을 추려서 냈다. 저자의 글을 블로그에서 처음 읽었던 당시에는 외주 교정자인 줄 몰랐다. 예전엔 읽은 책의 서평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했고 별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렸을 뿐이다. 그런데 그 긴 글을 다 읽고 났을 때 흥분을 가누기 힘들었다. 방금 내가 읽은 글이 얼마나 근사한지 떠들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백 개의 방」, 287쪽) 그리고 확신했다. 이 사람은 ‘잘 읽는 사람’이다. 잘 읽는다는 건 이런 거구나.


“등기된 사유와 등기되지 않은 사유 또한 마찬가지로 언어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푸코의 말마따나 "나는 말한다"라는 문장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과 달리 목적어뿐만 아니라 주어조차도 뒷걸음치게 만드니까. "나는 생각한다"가, 무엇을 생각하느냐(목적어)를 통해서 '생각하는 나', 즉 누가 생각하느냐(주어)를 향해 간다면, "나는 말한다"가 향하는 곳은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무엇을 말하는지(목적어)도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아니 그러하기에, 누가 말하는지(주어)도 아무런 경계를 갖지 못하는 곳이니까.”(「소설의 바깥」, 180쪽)

 

* <월간 이리> 11월 호. 원고를 보내고 나면 고치고 싶은 구석이 또 눈에 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잘 해야지 매번 다짐하는데도 그렇다.

 
 

 


이모부의 서재

저자
임호부 지음
출판사
산과글 | 2013-09-09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어느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 우울할 때마다 한 권씩!‘오후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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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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