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미래:라다크로부터배운다(개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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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녹색평론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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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고 싶은 말. 이 책은, 중앙북스 라는 출판사와 녹색평론사 라는 출판사 에서 각각 나왔는데, 녹색평론사 책을 읽을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중앙북스 판 번역을 읽어본 것은 아닌데 녹색평론사 라는 출판사가 워낙 훌륭한 출판사이고 녹색평론사 판 번역도 크게 나쁘지 않고 책이 재생용지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가볍기 때문이다. 중앙북스 판은 아주 럭셔리한 느낌의 표지여서 이건 아닌데 싶었다. 참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서울대 앞 사회과학서점 그날이오면 에서 산 책이어서 의미가 깊다.

제목을 '소중한 실마리들' 이라고 붙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최근 읽은 우석훈씨의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는 조직론적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조직을 분석하고 있는데 기업이 주 대상이지만 조직 일반에 대한 개념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런 분석틀을 자의적으로 살을 좀 붙이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개념 비스무리한 것을 얻게 된다(물론 경제학에 대해 전혀 무지한 사람으로서 곁가지로 소개되는 이런 개념들을 접한들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어렵더라).

대사람 이라는 조직에 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조직론의 범위에 적극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다. 나름 대사람이 어떤 방향의 조직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데 있어서 '오래된 미래'가 어떤 방식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지금 말고, 조직경제학을 좀 제대로 알게 될 나중에.   

'오래된 미래'는 1975년에 라다크에 도착해 1년만에 라다크어를 다 익힌 스웨덴의 여성 언어학자가 15년 이상 라다크 사회를 지켜본 뒤 쓴 훌륭한 인류학 서적이다.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 전통'과 '제2부 변화' 그리고 '제3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이다. 이 중 전통 부분은 변화 - 개발이라는 - 의 바람이 불기 전 라다크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개정증보판이 29쇄나 나오고 네이버에서 추천 오늘의 책! 에 올라올 정도로 굉장한 책이다.

직접적으로 혁명이라던가 정치세력의 결성이라던가 정치적, 혹은 거시경제적 논리를 제시하진 않는다. 그런데 라다크 사회에서 꾸려진 모임이나 저자 본인이 에콜로지의 결성을 통해 라다크 사회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을 우리 사회 식으로 해석해보면 굉장히 급진적인 것이 될 거다. 반개발이라는 개념은 counter-development 인데 anti-development로 번역하기 보다 뭐랄까. 개발을 부정한다는 의미의 반대-개발 이 아니라, 서구식 개발과는 다른 개발 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영어 실력이 딸려서... 

이 라다크 사회라는 게 좀 충격적인데 우리가 흔히 자본주의적 개발 이전의 원시 사회를 생각할 때처럼, 약간 낭만적이지만 물질적 결핍으로 인해 분명히 뭔가 모자라는 이미지가 아니라, 지속가능하고 풍요로운 삶이라는 기준에서 아주 정합적이다. 3부에서 밝히듯 저자 자신 역시 라다크 사회가 문제가 없다거나 개발이 전혀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다크 사회가 확실히 서구 사회보다는 훨씬 더 두 가지 기준에서 뛰어나다는 것인데 사회가 정합적이지 않고 빈틈 숭숭 뚤려 있다면 이런 평가는 불가능하다.

슬픈 일이지만 내 생각에는 제3세계 가 외부세계에 열린 순간,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다. 도저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물질적 풍요 하며, 한겨울 춥지 않은 집에 있을 수 있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고! 밤에 촛불 대신 환한 조명 아래 책을 읽을 수 있고! 이런 것들은 실제로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필요한 변화이다.

그러나 개발의 순간을 어느 정도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지역 사회의 전통을 죽이지 않고, 그 토대 위에서, 라다크 사회의 다양한 전통들을 살리면서 개발을 접합시키는 것. 호지 자신은 '적정기술'과 '탈중심화'로 counter-development를 설명한다.

또한 현대 서구 사회가 생태주의니 웰빙이니 하는 것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라다크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인데, 이런 것을 포함해 개발 과정에서 이미 선행됐던 사례들과 같은 정보는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별로 오랜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이런 생각은 할 수 있고, 재빨리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실제로, 개발 이전의 사회가 서구식 개발을 맞이하는 그 순간(한국으로 치면 19세기 후반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일제 시대가 본격적인 개발 시기였지만 한국민들의 의사결정이 불가능했으므로 해방 이후 약 5년 간)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이후 그 사회를 엄청나게 규정하는 것 같다. 정치적, 제도적 모델링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화라든가,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대화의 방식 등등. 이 시기에 서구식 개발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호지가 말하는 것처럼 개발에 대한 필요한 정보를 얻으면서 자기 사회와 서구 사회를 비교하고 이를 통해 적절한 개발의 방향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시기라는 게 보통 외세의 개입이 시작되거나 본격화되는 순간이고, 개발의 여파가 정치와 경제 모두에 강력한 혼란을 야기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중심을 잃지 않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전통과 서구 사회를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으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수준 혹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높아야 가능한 것 같다. 라다크 사회를 보면, 라다크 지식인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그룹이 10년 정도 되는 짧은 시간 안에 탄생하는 등 라다크 사회에 그만한 잠재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그룹의 활동이 여러 계층의 라다크 주민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최초에 호지와 같은 서구 지식인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런 등장이 매우 늦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정말 확실하다. 이건 운도 뒤따라야 되는 것 같다. 만약 호지가 중남미 지식인이었다면? 라다크 인이었다면? 그녀가 스웨덴 출신의 여성 인류학자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티벳 근처의 20만도 안되는 라다크 라는 지방의 변화에 세계의 이목을 이끈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라면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읽고 나니, 탈중삼화니 적정기술이니, 도무지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암울하다.

그렇지만 책에서 '진보'라는 개념 속에 포함돼 있는 개발을 비판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 진보에 개발을 포함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맑스의 명제가 제국주의적 개발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던 역사가 여전히 서구 사회의 진보라는 개념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진보 라는 개념은 개발 이라기보다는 복지, 평등, 분배 와 같은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다양성, 창조성 등은 진보라기보다는 우파들이 더 잘 활용해온 것 같다.  

호지는 이미 경제 규모로 10권에 접어든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유의미한 메세지를 던진다. 이미 선행된 개발과 앞으로도 여전할 개발들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된다. 되살릴 수 있는 전통이나 공동체적 제도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212쪽;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증상을 치료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려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의 체계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들어가보면, 인종적 폭력, 물과 공기의 오염, 가족의 와해, 문화적 해체 등 겉보기에 관련이 없는 듯한 문제들이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러한 문제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문제들의 접점을 발견한다면 그것들과 맞싸우려는 우리의 시도가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가닥을 잡아당기면 되느냐 하는 문제로 된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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